대학생활 회고(라 쓰고 '추억팔이'로 읽는다)
지난 주에 드디어 대학교를 졸업했다. 2017년 2월에 입학한 나의 대학생활은 장장 6년 6개월에 걸친 여정 끝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대로 나의 대학 생활이 아득한 추억 속에서 휘발되기에는 아쉽다고 생각해서 내가 대학교에 다니면서 들었던 강의들, 그 외에 의미있었던 활동들을 기억 깊숙한 곳에서 끄집어내서 박제하려고 한다. 전공과목 여부와 상관없이 나의 대학 생활에서 의미있는 영향을 끼친 강의들과,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를 중점적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유난히 독특했던 한 컴공생...
내가 들었던 강의들이 다른 컴공과 학생보다 유별난 구석이 있다. 특히나 교양과목에서 두드러지는데, 나는 교양과목을 선택할 때 나름의 철칙이 있었다. 바로 전공과 관련없는 분야의 학문의 강의를 많이 들으려고 했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대학교에서 얻으려는 목표는 각기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졸업장만 필요할 수 있고, 누군가는 높은 학점을 받아서 좋은 회사나 대학원을 가는 게 목표일 수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 그보다 더 중요시 여긴 목표는 내가 모르는 세상을 최대한 많이 접해보자 였다.
우리는 대부분 초중고등학교부터 항상 점수에 얽매인 인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흔히들 대학교에 가면 시험으로부터 해방된다,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막상 대학교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대학교에서 와서도 또다른 학점 경쟁, 수강신청 경쟁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에서 현타가 느껴지면서 회의감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생활만큼은 정말 '즐겜' 하고 싶었다. 점수에 연연하지 말고 내가 정말 듣고 싶은 과목, 궁금한 분야의 과목을 들어보고 싶었다. 어차피 컴공이 전공이기 때문에 컴퓨터 관련과목은 실컷 듣게 될테니, 교양과목은 완전히 반대되는 분야인 인문/사회 계열을 듣고 싶었다. 단순히 그 분야의 지식이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궁금했던 건 그 분야를 몇십년동안 연구했던 학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분야를 오랫동안 공부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자신의 분야에 맞춰져서 바라보는 경향이 짙어진다.일반인의 시선으로는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들도 연구자에게는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마치 카메라에 색깔 필터를 적용하면 세상이 온통 그 색깔로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세상을 하나의 필터로만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는 여러 종류의 필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대학교에서 등록금을 내고 수업을 듣는다는 건, 그 연구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다고 생각한다. 대학교는 이러한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을 한 곳에 모아둔 공간이고 인생에서 몇 안되는 값진 기회이기 때문에 나는 이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고 싶었다.
기억에 남는 강의
글쓰기
1학년 신입생들은 반드시 들어야하는 강의였다. 대부분의 이과생들에게 '글쓰기'란 물과 기름처럼 친해질래야 친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나 역시도 처음에는 글쓰기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단정지어왔다. 하지만 이 강의를 들으면서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일단 교수님이 딱딱하지 않고 유쾌하신 분이었다. 내가 대학교 입학 전에 생각했던 '대학교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엄격하고 보수적인 사람이었는데, 내가 만난 교수님은 학생들과 같이 농담도 나누면서 그 고정관념을 어느정도 깨주셨다. 그리고 '글쓰기'라는 행위에 대해서도 너무 어렵게 접근할 필요없이 '자신이 가장 흥미를 가질만한 분야'를 토대로 글을 작성하면 된다는 식으로 학생들이 갖고있는 글쓰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계속 우리를 격려해주셨다.
그리고 중간고사로 과제가 하나 주어졌는데, 아무 주제를 하나 선정해서 1000자 이내의 글을 하나 작성하는 것이었다. 처음 글을 쓸 당시에는 이렇게 쓰는게 맞는지 긴가민가 했다. 머릿속에는 분명 얘기하고 싶은 주제가 있었는데, 그 내용을 텍스트로 옮기려고하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나의 생각을 텍스트로 실체화하여 변환하는 작업에는 손실이 생기게 되는데, '글쓰기'란 최대한 그 손실을 줄이면서 텍스트로 옮겨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내가 쓴 글을 계속 지웠다 썼다를 반복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읽힐 때까지 퇴고했다. 과제를 제출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 글이 과연 남들에게 어떻게 읽힐지에 대해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내 글은 교수님으로부터 호평을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솔직하게 드러냈다는 점이 인상깊었다는 의견을 주셨다.
이 일을 계기로 '나 생각보다 글쓰기에 소질이 있을지도...?'
하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지금의 개발 블로그를 운영하게 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세계
내가 입학해서 처음으로 선택한 교양과목이라 기억에 남는다. 강의는 이름 그대로 여러가지 영화를 보면서 분석해보고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 알아보는 과목이다. 그 당시에 내가 영화 보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보면서 느꼈던 점을 다른사람들과 공유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청했다. 나름 인기있는 과목이라 수강신청이 치열했었다.
중간고사는 단편영화 하나를 보고 분석하는 글을 쓰고, 기말고사는 조별로 영화 한 편을 선정하여 직접 분석해야했다. 내가 있었던 조는 '컨택트'라는 영화를 선정했다. 외계생명체가 지구를 침략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영화 분석하느라고 당시에 20번 정도 돌려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양 과목 하나에 뭐 그렇게 시간을 많이 쏟았나 싶기는 한데, 열정 가득한 1학년 시절이다보니 가능했었던 일인 것 같다.
컴퓨터 구조
, 운영 체제
수업도 수업이지만 과제가 어렵기로 유명한 두 과목이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컴퓨터 구조의 첫 번째 과제였는데, C언어로 MIPS Processor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과제 기한은 3주정도 주었는데, 다른 과목이라면 3주가 엄청 널널한 기간이었겠지만, 컴구에서는 과제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1주정도 걸리고, 구현하는데 1주가 걸렸었던 기억이 난다.
과제는 어려웠던 대신에 교수님의 강의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딴짓하지 않고 100% 강의에 집중하면서 들었던 과목이었다. 컴퓨터의 프로세서, 메모리 구조, 연산 원리, 가상메모리에 대해서 배웠던 기억이 난다. 배울 당시에는 이 지식들을 언제 써먹나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CS지식의 근간을 세우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어 여러모로 열심히 공부해두길 잘 했다고 생각한 과목이었다.
웹 시스템 설계
내가 개발자의 진로를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선택하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과목이었다. 웹 페이지를 하나 개발하는 프로젝트성 강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 강의에서 사용한 라이브러리가 vue.js
였다. 이 라이브러리가 4년이 지난 지금 나의 메인 기술스택이 되리라곤 상상치도 못했다.
사실 이 과목을 들을 당시에는 내가 웹개발에 대한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했다. 그래서 DOM이 무엇인지, vue.js
가 무엇인지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조금 늦게 시작하긴 했지만 그 전까지 내가 공부하던 C,C++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맨날 운영체제같은 low-level만 다루는 코딩을 하다가, 처음으로 사용자가 직접 맞닿는 영역에서 개발을 접해보니 신세계였다. 내가 몰랐던 세상 중에서도 이렇게 재밌는 분야가 있었구나, 하는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정수론
많은 사람들은 왜 컴공이 정수론 강의를 들었냐고 물어보겠지만,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그냥 '궁금해서'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당시의 나는 알고리즘 소학회에서 마침 정수론과 관련된 지식(페르마 소정리, 중국인 나머지 정리)들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겸사겸사 수학과 강의로 열리니 한번 들어보자는 호기심이 발동해서였다.
학교를 다니면서 처음으로 타학과의 전공 강의를 들어보았는데, 수학과의 수업은 컴공의 그것과는 상당히 분위기가 달랐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수학과는 강의실의 자리가 앞에서부터 채워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강의실의 모든 사람들이 수업에 집중하면서 듣는다는 점도 놀라웠다.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컴공과 수업은 보통 자리가 뒤에서부터 채워지고 수업도 일부 듣는 사람만 듣기 때문이다.
이것이 수학과의 위엄인가...? 나랑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이 강의를 듣는 내내 수학과 학생들과 교수님이 모두 존경스러웠다.
영화와 사회심리
나는 교양과목 중에서 심리학 관련 강의를 유독 좋아했다. 인간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리고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나의 평소 관심사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심리학 강의를 들어보았는데 아직까지도 이 강의가 기억에 남는다.
강의에서는 기본적으로 '사회심리학'관련 이론들을 가르쳐주는데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영화의 한 장면을 예시로 들어서 보여준다는 점이 독특하다. 강의 내용도 심리학 이론을 어렵지 않게 잘 풀어냈기 때문에 재밌게 느껴지기도 했었고, 무엇보다 교수님이 정말 열정적으로 강의해주시는 게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전공 분야에 있어서 자부심을 느끼면서 강의를 하시는 모습이 듣는 사람에게도 전달될 정도였다. 어쩌면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배우기 위해서'라는 취지에 가장 알맞은 강의가 아니었을까 싶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그렇게 느끼는건지 강의 평가도 매우 높은 편에 속했고 수강신청 난이도도 어려운 과목이었다.
아쉬웠던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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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많이 못 읽었다.
대학교 다니면서 내 나름의 목표 중 하나는 한달에 책 한권씩 읽기였다. 통학할 때 왕복으로 2시간이 넘게 걸렸기 때문에 시간이 그냥 버려지는게 아쉬워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1,2학년에는 시간이 널널해서 책을 읽을만한 여유가 있었지만, 3학년부터는 과제와 취업준비에 치이면서 독서에 소홀했었던 점이 아쉽다.졸업할 때쯤 대출이력을 살펴보니 약 50권정도 빌린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 중에는 기술서적이나 강의 교재도 포함되어 있어서 실질적으로는 독서를 위한 책은 40권 정도이다.
40권 중에서는 소설이 가장 많았다. 공대생이기 때문에 오히려 정반대 분야의 책을 읽는 게 삶의 균형을 맞추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소설을 읽을 때에는 공부할 때와는 다른 뇌의 영역이 활성화되는 느낌이었다(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였다. 나머지는 주로 내가 관심있는 분야인 심리학과 진화학 관련 분야의 책을 빌렸다. -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나 자신이 지나치게 안전영역(safe area)에만 안주해있었던 게 아닐까 되돌아보게 된다. 개인 성격상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애써 나서지 않는 성격이다보니 항상 아는 사람만 만나게 되었다.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인생에서 '대학교'라는 시기만큼은 조금 더 외향적인 성격으로 나아갔어도 최소한 손해볼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자신의 성격은 바꾸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
개발분야를 좀 더 빨리 접해보고 싶었다.
내가 대학교 때 했던 코딩의 90%는 알고리즘과 PS(Problem Solving)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나의 코딩이 지나치게 PS에 overfitting 되어있었고, 개발이라는 분야는 3학년 후반이 되어서야 처음 접하게 되었다. 늦은 시기는 아니었지만 조금만 일찍 개발을 접했더라면 프론트,백엔드,모바일,ML 등 여러 분야를 두루두루 공부해보면서 내 진로를 찾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는 사회 초년생으로
대학교는 이제 막 졸업했지만 사회인으로는 아직 병아리에 불과하다. 좀 얼떨떨한 기분이다. 내가 진짜로 사회인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걸까? 세월이 절벽 앞에 서있는 나의 등을 떠미는 바람에 억지로 밀려난 기분이다.
사회인은 사회인으로서 요구되는 역량이 대학생과 달라지기 때문에 나는 또 다시 공부해야한다. 특히나 내가 가장 걱정인건 금융/재테크 관련 분야이다. 사실 나 이 분야에 관해서는 정말 문외한이다. 내 주변 친구들은 요즘 금리가 어떻고, 주식이 어떻고에 대해서 토론하던데 나는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개발자로서는 개발 공부도 해야하지만, 더 큰 범주에서 나는 사회인이기에 이쪽 분야의 공부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처지이다.
결국에 내 지식이 다시 초기화되었다. 대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느꼈던 기분과 유사하다. 이제 좀 대학 생활에 익숙해졌다 싶으니깐 졸업해버리고 새로운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인생은 항상 불완전함의 연속이다. 언제쯤되면 나도 사회인으로서 익숙해질 수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